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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다 데쓰야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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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이다 데쓰야(1968년)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외야수와 2루수로 활약했다. 다쿠쇼쿠 대학 고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7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2004년까지, 2005년부터 2006년까지는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1992년 도루왕, 베스트 나인, 7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으며,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2회, 골든 스피릿상을 받았다. 은퇴 후에는 코치와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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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다 데쓰야 (196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이다 데쓰야
이이다 데쓰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절
포지션외야수 / 코치
출생지도쿄도 조후시
타석
투구
NPB 데뷔1989년 4월 12일
NPB 마지막 경기2006년 10월 1일
선수 경력
선수야쿠르트 스왈로스 (1987–2004)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005–2006)
코치 경력
코치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2007–2013)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15–2019)
다쿠쇼쿠대학 고료 고등학교 야구부 (비상근 코치)
수상 경력
타이틀1x 센트럴 리그 도루왕 (1992)
베스트 나인1x 센트럴 리그 베스트 나인 (1992)
골든 글러브7x 센트럴 리그 골든 글러브 (1991-1997)
일본 시리즈 우승4x 일본 시리즈 우승 (1993, 1995, 1997, 2001)
올스타2x NPB 올스타 (1992-1993)
통산 기록 (2006년 기준)
타율.273
홈런48
안타1248
기타 정보
드래프트1986년 드래프트 4위
등번호 (선수)78

2. 프로 입단 전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야구를 하면서 놀았고, 고라쿠엔 구장에서 본 오 사다하루하리모토 이사오의 활약상에 감동받아 프로 야구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53] 초등학교 4학년 때 ‘우에노하라 멤버스’에 입단해 투수로서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조후 시 진다이 중학교에서도 투수를 맡아 3학년 때에는 시대회에서 우승을 이끌었다.[53] 도쿄도내의 강호로 알려진 니혼 대학 제3 고등학교나 테이쿄 고등학교로의 진학도 목표로 하였지만 중학교 야구부 고문과 고에다 마모루 감독이 니혼 대학의 동창 사이라는 인연도 있어 설비나 환경에 만족감을 드러내며 지바현에 소재하고 있는 다쿠쇼쿠 대학 고료 고등학교에 입학했다.[53]

다쿠쇼쿠 대학 고료 고등학교에서는 동급생인 사토 유키히코가 있었고 학교도 야구부 강화에 주력하고 있었다. 입학 후에는 외야수가 된 후 2학년 때 50m 달리기에서 6초 1의 빠른 발과 멀리 던지기 100m 이상의 튼튼한 어깨라는 신체 능력에 주목하여 포수로 전환되었다.[53] 3학년 때인 1986년에는 봄과 여름 연속으로 고시엔 대회에 출전하여 춘계 선발 대회(제58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는 홈런을 때려냈고 수비에서도 1이닝 3개의 보살을 기록하는 등[54] 5번·포수로서 활약하였다. 지바 대회(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지바 대회) 결승에서는 나중에 야쿠르트의 동료가 되는 도바시 가쓰유키가 소속된 인바 고등학교를 누르고 하계 선수권 본대회(제68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유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었지만[53] 3차전에서 하세가와 시게토시가 소속된 도요 대학부속 히메지 고등학교한테 0대 1로 패했다.

같은 학년의 포수 중에서는 다카노스 농림고등학교의 나카지마 사토시나 서일본 단기대학 부속고등학교의 아오야기 스스무와 함께 이이다는 드래프트 지명 후보로 주목을 끌었다.[53] 같은 해 드래프트에서 야쿠르트는 나카지마를 지명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한큐 브레이브스가 나카지마를 3순위로 지명했기에 직후에 4순위로 이이다를 지명하여[53] 야쿠르트 입단을 결정했다. 야쿠르트는 이이다를 지명한 이유에 대해서는 신체 능력의 높음과 재주가 있다는 점을 평가했다고 한다. 계약금은 2800만, 연봉은 320만(모두 추정)이었다.[55]

3. 야쿠르트 시절

야에가시 유키오가 주전 포수였기 때문에 이이다는 2번째 포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56] 1988년 오프 시즌에는 미국으로 야구 유학을 떠나 마이너 리그의 젊은 선수들이 가진 헝그리 정신에 감명을 받았다. 1989년에는 1군에 승격하여 4월 12일에 1군 첫 출전을 기록했고, 같은 해 포수로서 22경기에 출전하며 세키네 준조 감독에게서 받은 기회를 살려냈다. 1989년 시즌 종료 후 노무라 가쓰야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유마에서 열린 스프링 캠프에서 나카니시 지카시, 하타 신지, 신인 선수 후루타 아쓰야 등 9명과 함께 주전 포수 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되었다. 2루 송구 타임 트라이얼에서는 후루타에 이어 2위를 기록하는 등 어필했지만, 빠른 발에 주목한 노무라 감독에게서 포수용 글러브를 몰수당하고 외야수용 글러브를 건네받으며 수비 위치가 변경되었다.[57]

1990년 시범 경기에서 드웨인 머피가 부상을 당해 중견수로 출전했고, 이어서 이케야마 다카히로가 부상을 입자 유격수로도 두 경기에 출전하는 등 포지션 변동이 잦았다. 정규 시즌 개막 이후에는 포수로 등록되어 벤치 신세를 지기도 했다.[56] 그러나 4월 21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2타석 연속 2삼진으로 부진했던 도마시노 겐지의 대타로 나서 프로 데뷔 첫 홈런을 때려냈고, 곧바로 2루수 수비를 맡게 되었다. 외야수용 글러브밖에 없었기 때문에 마루야마 간지 코치에게서 연습용 글러브를 빌리는 등 혼란을 겪었으나,[57] 이후 시즌 내내 주전 2루수 자리를 차지하며 29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이듬해인 1991년에 입단한 조니 레이가 2루수를 고집했기 때문에 이이다는 중견수로 전향했고, 그 직후부터 ‘천직’이라고 불릴 정도의 뛰어난 외야 수비 실력[58]을 선보이며 그 해부터 1997년까지 7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타격에서도 개막 이후부터 선발 1번 타자로 출전하여 두 경기에서 8타수 6안타를 기록하며 순조롭게 1번 타자 자리를 굳혔다.

1992년에는 야나다 고이치, 하시가미 히데키 등과 경쟁하여[59] 1번 타자 자리를 차지했고, 4월 26일 히로시마전에서 25년 만에 첫 회 선두 타자 런닝 홈런을 기록했다. 8월 4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는 나카다 고지가 공을 던질 때 단독으로 홈스틸을 성공시키는 등[58] 스피드가 더욱 향상되었다. 5월부터 시즌 종료까지 27연속 도루라는 센트럴 리그 기록을 세웠고, 최종적으로 33개의 도루를 기록하여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팀이 14년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처음으로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었다.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타율 3할 6푼 7리의 맹활약을 펼쳐 우수 선수상을 받았지만, 10월 26일 7차전 7회초 2사 1, 2루 상황에서 타석에 투수 이시이 다케히로가 들어섰을 때 얕은 수비를 펼친 결과, 우중간으로 빠지는 타구에 손이 닿았음에도 동점 적시타를 허용한 것에 대해 분해했다.[81] 일본 시리즈 이후 출전한 미일 야구에서는 미국에 건너간 지 2년째에 안면이 있던 셰인 맥, 카를로스 바에르가와의 대전을 즐겼으나,[60] 4차전에서 홈으로 들어갈 때 오른쪽 어깨 탈구와 함께 인대까지 끊어져 수술을 받았다.[61] 계약 갱신에 따라 연봉이 약 세 배가 늘어난 6050만(추정)으로 재계약을 맺었다.[62]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이이다는 부상과 타격 부진에도 불구하고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했다. 1993년에는 일본 시리즈에서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고, 1994년에는 주전 중견수 자리를 되찾아 타율 2할 9푼, 30도루를 기록했다. 1995년에는 시즌 130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1996년에는 무릎과 발목 부상으로 도루 개수가 줄었지만, 1997년에는 부상에서 회복하여 타율 3할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다시 한번 기여했다.

1998년부터 2004년까지는 부상과 타격 부진, 그리고 다른 외야수들의 활약으로 인해 출전 기회가 감소했다. 1998년에는 왼손 새끼손가락 부상으로 5년 만에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했다. 2001년에는 경기 종반에 중견수 수비를 맡는 등 수비 능력은 여전히 높게 평가받았다. 2002년에는 왼쪽 무릎 부상으로 33경기 출전에 그쳤다. 2004년에는 3경기 출전에 그쳐 팀의 전력 구상에서 제외되었고,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무상 트레이드되었다.

한편, 이이다는 1994년부터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 ‘이이다 시트’(飯田シート일본어)를 마련해 매 경기 20명씩, 총 17,000명 이상의 소년들을 자비로 초대하여 관전할 수 있도록 사회 공헌 활동을 한 공적을 인정받아 2002년 11월 22일에 골든 스피릿상을 수상했다.

3. 1. 입단 초기 ~ 1992년

야에가시 유키오가 주전 포수였기 때문에 이이다는 2번째 포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56] 1988년 오프 시즌에는 미국으로 야구 유학을 떠나 마이너 리그의 젊은 선수들이 가진 헝그리 정신에 감명을 받았다. 1989년에는 1군에 승격하여 4월 12일에 1군 첫 출전을 기록했고, 같은 해 포수로서 22경기에 출전하며 세키네 준조 감독에게서 받은 기회를 살려냈다. 1989년 시즌 종료 후 노무라 가쓰야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유마에서 열린 스프링 캠프에서 나카니시 지카시, 하타 신지, 신인 선수 후루타 아쓰야 등 9명과 함께 주전 포수 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되었다. 2루 송구 타임 트라이얼에서는 후루타에 이어 2위를 기록하는 등 어필했지만, 빠른 발에 주목한 노무라 감독에게서 포수용 글러브를 몰수당하고 외야수용 글러브를 건네받으며 수비 위치가 변경되었다.[57]

1990년 시범 경기에서 드웨인 머피가 부상을 당해 중견수로 출전했고, 이어서 이케야마 다카히로가 부상을 입자 유격수로도 두 경기에 출전하는 등 포지션 변동이 잦았다. 정규 시즌 개막 이후에는 포수로 등록되어 벤치 신세를 지기도 했다.[56] 그러나 4월 21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2타석 연속 2삼진으로 부진했던 도마시노 겐지의 대타로 나서 프로 데뷔 첫 홈런을 때려냈고, 곧바로 2루수 수비를 맡게 되었다. 외야수용 글러브밖에 없었기 때문에 마루야마 간지 코치에게서 연습용 글러브를 빌리는 등 혼란을 겪었으나,[57] 이후 시즌 내내 주전 2루수 자리를 차지하며 29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이듬해인 1991년에 입단한 조니 레이가 2루수를 고집했기 때문에 이이다는 중견수로 전향했고, 그 직후부터 ‘천직’이라고 불릴 정도의 뛰어난 외야 수비 실력[58]을 선보이며 그 해부터 1997년까지 7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타격에서도 개막 이후부터 선발 1번 타자로 출전하여 두 경기에서 8타수 6안타를 기록하며 순조롭게 1번 타자 자리를 굳혔다.

1992년에는 야나다 고이치, 하시가미 히데키 등과 경쟁하여[59] 1번 타자 자리를 차지했고, 4월 26일 히로시마전에서 25년 만에 첫 회 선두 타자 런닝 홈런을 기록했다. 8월 4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는 나카다 고지가 공을 던질 때 단독으로 홈스틸을 성공시키는 등[58] 스피드가 더욱 향상되었다. 5월부터 시즌 종료까지 27연속 도루라는 센트럴 리그 기록을 세웠고, 최종적으로 33개의 도루를 기록하여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팀이 14년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처음으로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었다.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타율 3할 6푼 7리의 맹활약을 펼쳐 우수 선수상을 받았지만, 10월 26일 7차전 7회초 2사 1, 2루 상황에서 타석에 투수 이시이 다케히로가 들어섰을 때 얕은 수비를 펼친 결과, 우중간으로 빠지는 타구에 손이 닿았음에도 동점 적시타를 허용한 것에 대해 분해했다.[81] 일본 시리즈 이후 출전한 미일 야구에서는 미국에 건너간 지 2년째에 안면이 있던 셰인 맥, 카를로스 바에르가와의 대전을 즐겼으나,[60] 4차전에서 홈으로 들어갈 때 오른쪽 어깨 탈구와 함께 인대까지 끊어져 수술을 받았다.[61] 계약 갱신에 따라 연봉이 약 세 배가 늘어난 6050만(추정)으로 재계약을 맺었다.[62]

3. 2. 1993년 ~ 1997년

1993년에는 주위의 예상을 웃도는 빠른 회복으로[63] 개막전에 선발 출전했지만 타격이 안정되지 않아 조 도모히로 등과 번갈아 나오는 경우가 많아 팀은 1번 타자를 고정하지 못하고 고전했다.[64] 타율 2할 1푼 6리, 11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감했다. 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4차전 8회초에 홈으로 송구하여 2루 주자의 홈인을 저지했고 일본 시리즈 통산 타율 4할의 성적으로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81]

1994년에는 주전 중견수 자리를 되찾아 타율 2할 9푼, 30도루를 기록, 시즌 후에는 연봉이 2,500만 엔 증가한 8500만(추정)이 되었다.[65]

1995년 4월 8일 개막 2경기째에 구와타 마스미에게 몸에 맞는 볼을 맞은 영향으로 타격 부진에 시달렸지만 시즌 130경기에 모두 출전, 연봉은 9500만(추정)으로 증가했다.[66] 9월 30일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테리 브로스가 9회 2사 상황에 마쓰이 히데키의 외야 플라이를 잡아내 리그 우승을 결정지었다. 그 해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 첫 회에 볼넷으로 출루한 후 나카지마 사토시를 상대로 도루를 성공, 2회 두 번째 타석에서는 선제 적시타를 때려내 승리에 기여했지만 일본 시리즈 타율은 2할 6푼 1리로 3할 아래로 떨어졌다.

1996년에는 무릎과 발목 부상으로 도루 개수가 13개로 크게 줄었다. 1997년에는 부상에서 회복하여 시즌을 맞이했으나 7월 1일 요미우리전에서 내야 땅볼을 때린 뒤 1루수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부딪혀 왼쪽 무릎에 타박상을 입었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출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 노무라 가쓰야 감독의 분노를 사 2군으로 내려갔고, 대신 중견수를 맡은 마나카 미쓰루가 4할에 가까운 타율을 기록하여 1군 복귀는 8월 8일이 되었다. 이 일에 자극받아 최종적으로 타율 3할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지만 10월 11일 히로시마전에서 슬라이딩으로 귀루할 때 왼쪽 어깨뼈가 부러져 그 해 일본 시리즈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시즌 종료 후 자신의 최고 연봉인 1.25억(추정)으로 계약을 갱신해[67] 후루타 아쓰야에 이어 팀 내 2위의 높은 연봉을 차지했다.

3. 3. 1998년 ~ 2004년

1998년 4월 23일 주니치전에서 왼손 새끼손가락의 제2관절 탈구를 동반하는 박리골절을 입어[68] 5년 만에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했다. 그해 자유 계약 선수 권리를 획득해 연봉은 20% 삭감된 1억이 되었지만 재계약금 5000만을 받아 5년간 장기 다년 계약을 맺었다.[67] 이후 몇 년 동안은 계속되는 부상이나 극심한 타격 부진, 마나카 등 다른 외야수들의 활약으로 인해 출전 기회가 감소되었다. 2001년 경에는 우완 투수와 상대할 때 벤치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경기 종반에 중견수인 마나카가 알렉스 라미레스로 바뀌면서 좌익수 자리에 들어갔고 이이다가 중견 수비를 맡는 등 수비 능력은 높게 평가받았다.[69]

2002년에는 개막 직후 왼쪽 무릎 후방십자인대를 다쳐 33경기 출전에 그쳤고, 야구협약의 규정을 넘는 50%가 삭감된 연봉 5000만으로 계약을 갱신했다.[70] 한편, 1994년부터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 ‘이이다 시트’(飯田シート일본어)를 마련해 매 경기 20명씩, 총 17,000명 이상의 소년들을 자비로 초대하여 관전할 수 있도록 사회 공헌 활동을 한 공적을 인정받아 11월 22일에 골든 스피릿상을 수상했다. 2004년에는 3경기 출전에만 그쳐 팀의 전력 구상에서 제외되었고, 지도자로 와달라는 권유도 받았지만 현역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나타내 신생팀인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 은퇴 후 코치 부임을 조건으로 무상 트레이드되었다. 세키카와 고이치도 라쿠텐에 함께 이적했다.

4. 라쿠텐 시절

라쿠텐 시절 2군 생활이 길었지만, 1군에서는 2년 동안 통산 3할 7리의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71] 2006년 9월 16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서는 8회초 1사 상황에서 무실점으로 막아내고 있던 와다 쓰요시에게서 동점 솔로 홈런(본인의 마지막 홈런)을 쳐내며 경기를 무승부로 이끌었다. 같은 달 24일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는 선발 출전은 아니었지만 경기 도중 출장하여 2개의 적시타를 기록, 팀 승리에 기여하는 등 시즌 종반 상위 팀들의 우승 경쟁에 영향을 주는 활약을 펼쳤다. 창단 직후라 연습 환경이 충분하지 않았던 라쿠텐에서 젊은 선수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는 역할도 맡았다.[71] 구단의 코치 요청과 노무라 감독의 권유로 2006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5. 은퇴 후

2007년부터 친정팀 야쿠르트의 2군 외야 수비·주루 코치를 맡았고,[72] 이듬해 2008년부터 1군 수비 주루 코치로 보직이 이동했다. 2011년 12월 9일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후보자 명부·플레이어 부문에 오르기도 했다.[73]

2013년 10월 9일, 코치 계약 기간 만료로 야쿠르트를 퇴단했고,[74] 이듬해 2014년부터 닛폰 방송 야구 해설자로 발탁됐다.

6. 플레이 스타일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가진 1번 타자로서 야쿠르트의 리그 다섯 차례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야쿠르트 시절 마쓰이 마사노리 코치는 "트리플 스리도 가능하고, 야쿠르트의 이치로가 될 수도 있다"라며 이이다의 잠재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60] 이이다는 켄 그리피 주니어를 동경하여 타격뿐만 아니라 수비나 도루 또한 뛰어난 선수를 이상으로 삼았다.[60] 그는 30세부터 철저히 노력했으며, 그전까지는 야구에 대한 자세가 진지하지 못했다고 현역 은퇴 후에 회고했다.[81]

이이다는 신체 능력이 뛰어나 TBS 계열의 《스포츠맨 No.1 결정전》에 출전하여 제1회 대회를 포함해 2회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프로 스포츠맨 대회

대회방송일종합 순위
제1회 대회1995년 1월 1일1위
제2회 대회1996년 1월 2일7위
제3회 대회1997년 1월 2일10위
제5회 대회1999년 1월 1일1위
제6회 대회2000년 1월 1일4위


6. 1. 타격

이이다 데쓰야는 컨택 능력이 뛰어나고 속구에 대해서는 노스텝 타법으로 대응하는 경우도 있었다.[56] 방망이는 33.5인치(85.9cm)에 무게 920g과 930g의 것을 사용했다.[56] 톱 타자로서 출루를 위해 쉽게 띄우지 않고 땅볼을 치는 타격을 염두에 두었다.[59]

6. 2. 주루

이이다 데쓰야는 웨이트 트레이닝과 단거리 달리기를 통해 순발력과 날카로움을 길렀지만,[75] 50m 달리기 기록은 6초 0으로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58] 그는 배터리에게 항상 도루를 경계받았기 때문에, 세트 포지션에 들어간 투수의 몸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출발할 수 있는 감각을 익혔다.[60] 또한 투수의 버릇이나 투구 리듬을 읽고, 플라잉 낌새가 보이면 달리기 시작하기도 했다.[60] 이이다는 도루 개수보다 성공률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병살타가 나오지 않았을 때는 2루에서 홈까지 곧바로 달리는 등 항상 다음 루를 노리는 적극적인 주루 플레이를 펼쳤다.[60]

6. 3. 수비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센트럴 리그 레인지 팩터 1위 외야수였으며,[76][41] 수비 넘버원 외야수라는 의견도 있다.[77][42]

중견수로서의 수비력은 일본 프로 야구 최상위 수준이며, 중견수 7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 수상은 센트럴 리그에서 야마모토 고지의 10년 연속 수상에 이어 역대 두 번째 기록이다(2012년 기준). 외야수 전향 후 야시키 가나메의 조언으로 타격 연습 때도 수비를 연습, 살아있는 타구를 자주 다루며 투구 코스에 따른 타구 예측이 가능해졌다.[80][45] 약한 타구가 안타가 되지 않도록 얕은 수비 위치를 잡았다.[82][47]

수비 범위가 넓고, 1990년대 중반 메이지 진구 야구장 외야 펜스에 철망이 설치되기 전에는 펜스에 뛰어가 공을 잡는 것이 특기였다.[82][47] 외야 펜스를 이용한 삼각 뛰기로 홈런성 타구를 잡기도 했다. 포수 시절 경험으로 송구는 공을 잡은 후 한 단계에서 팔을 간결하게 흔들어 빠르게 던졌고, 컨트롤도 좋았다.[60][13] 타이밍이 아슬아슬할 때는 노바운드, 거리가 멀거나 잔디가 젖으면 원바운드로 던지는 등 상황 판단을 중시했다.[78][43] 1990년 2루수를 맡았을 때는 팀의 병살 개수가 감소하여 유격수 이케야마 다카히로에게 혼나기도 했다.[79][44]

1993년 일본 시리즈 4차전에서 70m 다이렉트 홈 송구로 2루 주자의 홈인을 저지한 플레이는 특히 유명하며,[80][45] 이이다 본인도 최고의 수비 플레이로 꼽는다.[81][46] 야쿠르트가 1점 앞선 8회초 2사 1, 2루 상황, 2루 주자는 도마시노 세이지, 타자는 스즈키 겐이었다. 벤치 지시는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지만, 종반 승부 상황에 역풍이 강해 얕은 수비 위치를 잡았고,[81][46] 원바운드성 타구를 잡아 즉시 던져 70m 거리에서 보살을 성공시켰다.

6. 4. 신체 능력

이이다 데쓰야는 신체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며, 시즌 종료 후 출전한 《스포츠맨 No.1 결정전》(TBS 계열)에서 제1회를 포함해 2회 우승을 차지했다.[82] 겐모쓰 에이조는 뜀틀 기획 등 이 프로그램에서 이이다의 모습을 보고 "체조 선수가 되었으면 틀림없이 세계 최고가 되었을 것이다", "2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인재"라고 극찬하며[83] 야구 외적인 분야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프로 스포츠맨 대회

대회방송일종합 순위
제1회 대회1995년 1월 1일No.1
제2회 대회1996년 1월 2일7위
제3회 대회1997년 1월 2일10위
제5회 대회1999년 1월 1일No.1
제6회 대회2000년 1월 1일4위


7. 상세 정보

이이다 데쓰야의 상세한 선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연도소속팀경기 수타석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루타타점도루도루자희생 번트희생 플라이볼넷고의사구사구삼진병살타타율출루율장타율OPS
1989야쿠르트221195110020201110050.111.200.222.422
1990117484441691231566168332916812806665.279.330.381.711
199110733829839728349826158942700512.242.301.329.630
199212557452169153248721442334923933835.294.345.411.756
199310327924435537227021113722640494.217.290.287.577
1994117503458571331943169373014643401546.290.338.369.707
199513058252278132197718631358734624748.253.317.356.673
1996105461424621231936166371391122321664.290.327.392.719
19971084644216212915731673726101132316434.306.349.397.746
19989631728641811111972894712112356.283.335.339.674
199972136124162650031311020911223.210.269.250.519
20001022191903148714691576702121411.253.330.363.693
20011052121873255100168961611800313.294.354.364.718
20023360588111001221101100142.190.200.207.407
2003661801562641803581732811500312.263.326.372.698
2004311100100011000000140.100.182.100.282
2005라쿠텐54136127114240046152341400185.331.348.362.710
20064099887241012892230800132.273.333.318.651
통산:18년1505506645646481248174424816503632349210626344162670062.273.326.362.688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이다.


통산 18년 동안 1505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273, 1248안타, 48홈런, 363타점, 234도루를 기록했다.

이이다 데쓰야는 도루왕(1992년), 베스트 나인(1992년), 골든 글러브상 7회(1991년 ~ 1997년), JA 전농 Go·Go상 2회(Go Spikes상: 1995년 4월, Super Arm상: 1995년 9월),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2회(1992년, 1993년), 골든 스피릿상(2002년)을 수상했다.

수상



이이다 데쓰야는 첫 출장, 첫 도루, 첫 안타, 첫 홈런, 첫 선발 출장 등의 첫 기록과 1000경기 출장, 1000안타, 1500경기 출장 등의 이정표 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한 올스타 게임에 2회 출전했고, 외야수 레인지 팩터 1위를 3회 기록했으며, 1회 선두 타자 런닝 홈런을 기록한 바 있다.[56][4]

달성일기록상대팀구장비고
1998년 8월 25일통산 1000경기 출장히로시마 도요 카프메이지 진구 야구장8회말 도바시 가쓰유키의 대주자로 출장, 역대 347번째 (다니시게 모토노부와 같은 날 달성)[4]
1998년 10월 9일통산 1000안타한신 타이거스메이지 진구 야구장7회말 나카고미 신에게서 우중간 2루타, 역대 193번째[4]
2006년 9월 22일통산 1500경기 출장세이부 라이온스풀캐스트 스타디움 미야기1번·중견수로 선발 출장, 역대 148번째[4]



연도등번호
1987년 ~ 1990년58
1991년 ~ 2006년2
2007년 ~ 2011년85
2012년 ~ 2013년88
2015년 ~ 2019년78


7. 1. 출신 학교

진다이 중학교와 다쿠쇼쿠 대학 부속 고료 고등학교를 졸업했다.[53]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고, 고라쿠엔 구장에서 오 사다하루하리모토 이사오의 활약에 감동받아 프로 야구 선수를 꿈꿨다.[53] 초등학교 4학년 때 ‘우에노하라 멤버스’에 입단하여 투수로서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고, 진다이 중학교에서도 투수를 맡아 3학년 때 시대회에서 우승을 이끌었다.[53] 도쿄도 내 강호로 알려진 니혼 대학 제3 고등학교나 테이쿄 고등학교 진학도 고려했지만, 중학교 야구부 고문과 고에다 마모루 감독이 니혼 대학 동창이라는 인연으로 지바현에 있는 다쿠쇼쿠 대학 부속 고료 고등학교에 진학했다.[53]

다쿠쇼쿠 대학 고료 고등학교는 야구부 강화에 힘쓰고 있었고, 이이다는 입학 후 외야수가 되었다가 2학년 때부터는 50m 달리기 6초 1의 빠른 발과 멀리 던지기 100m 이상의 강한 어깨를 인정받아 포수로 전향했다.[53] 3학년이던 1986년에는 봄과 여름 연속으로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다. 봄 대회(제58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는 홈런을 기록하고, 수비에서도 1이닝 3보살을 기록하는 등 5번 타자 겸 포수로서 활약했다.[54] 지바 대회 결승에서는 훗날 야쿠르트 동료가 되는 도바시 가쓰유키가 소속된 인바 고등학교를 꺾고, 여름 대회(제68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우승 후보로 꼽혔으나 3차전에서 하세가와 시게토시가 소속된 도요 대학 부속 히메지 고등학교에 0대 1로 패했다.[53]

7. 2. 선수 경력

飯田 哲也|이다 데쓰야일본어는 1987년부터 2004년까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2005년부터 2006년까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라쿠텐에서는 2군 생활이 길었지만, 1군에서는 2년 동안 통산 3할 7리의 높은 타율을 기록했다.[71] 2006년 9월 16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서는 8회초 1사 상황에서 와다 쓰요시를 상대로 동점 솔로 홈런(자신의 마지막 홈런)을 쳐 경기를 무승부로 만들었다.[71] 같은 달 24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는 선발이 아닌 경기 도중 출장이었지만 2개의 적시타를 때려 팀 승리를 이끌었다. 이처럼 종반에 상위 팀의 우승 경쟁을 흔드는 활약이 돋보였다. 창단 직후 연습 환경이 충분하지 않았던 라쿠텐에서 젊은 선수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는 역할도 맡았다.[71] 구단의 코치 요청과 노무라 가쓰야 감독의 권유로 2006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프로 선수 경력은 다음과 같다.

소속팀기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1987년 ~ 2004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2005년 ~ 2006년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야구를 하며 고라쿠엔 구장에서 오 사다하루와 하리모토 이사오의 플레이에 감동하여 프로 야구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1] 초등학교 4학년 때 우에노하라 멤버스에 입단하여 투수로 야구를 시작했다. 조후 시립 진다이 중학교에서도 투수를 맡았고, 3학년 때는 시 대회에서 우승했다.[1] 니치다이 산 고등학교나 테이쿄 고등학교 진학도 목표로 했지만, 지바현의 타쿠쇼쿠 대학 코료 고등학교에 입학했다.[1]

타쿠쇼쿠 대학 코료 고등학교에서는 동급생 사토 유키히코, 선배 오가와 히로후미, 후배 다카하시 노리유키와 와다 타카시가 있었다. 입학 후 외야수가 되었고, 2학년 때 포수로 전향했다.[1] 3학년 때 춘하계 고시엔에 출장했다. 제58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는 홈런을 쳤고, 수비에서도 1이닝 3보살을 기록했다.[2] 지바 대회 결승에서 츠치하시 카츠유키의 인바 고등학교를 꺾고, 제68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3회전에서 하세가와 시게토시의 토요다이 히메지에게 패했다.

같은 학년 포수 중 나카지마 사토시, 아오야기 스스무와 함께 드래프트 지명 후보로 주목받았다.[1] 1986년 드래프트에서 야쿠르트는 나카지마 지명을 예정했지만, 한큐가 3위로 지명하여 이이다를 4위로 지명했다.[1] 계약금 2,800만 엔, 연봉 320만 엔(추정)이었다.[3]

야쿠르트 입단 초기에는 야에가시 유키오가 주전 포수였기 때문에, 이이다는 2번째 포수 자리를 노렸다.[4] 1988년 오프에는 미국 야구 유학을 가서 마이너 리그 선수들의 헝그리 정신에 감명을 받았다.[4]

1989년에 처음으로 1군에 승격, 4월 12일 대주자로 첫 출장했다. 세키네 준조 감독에 의해 대주자 및 포수로 기용되어 22경기에 출장했다. 같은 해 오프에 노무라 가쓰야 감독이 취임했다. 노무라는 이이다를 주전 포수로 키우고 하타 신지를 3루로 전향시킬 의향을 보였다.[5] 후루타 아쓰야 등과 주전 경쟁을 했지만, 다카하타 야스마사 코치가 이이다의 신체 능력을 높게 평가하여[6] 유마 캠프에 1군 멤버로 참가, 2루 송구에서 후루타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1990년 오픈전에서 드웨인 머피 부상으로 중견수로 출장, 이케야마 다카히로 부상으로 유격수로도 2경기 출장했다. 개막 후 포수 등록으로 벤치에 들어갔다.[4] 4월 21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2타수 2삼진 후 토마노 쇼지 대타로 프로 첫 홈런을 치고 2루수 수비를 했다. 다음 경기부터 선발 출장, 시즌 동안 2루수로 정착하여 29도루를 기록했다.

1991년 신입 조니 레이가 2루수 출전을 고집, 이이다는 중견수로 전향했다. "천직"이라 불릴 정도의 외야 수비[10]를 보이며, 이 해부터 1997년까지 7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1번 타순에 들어가 2경기 8타수 6안타로 좋은 출발을 보였다.

1992년 야나기다 고이치, 하시가미 히데키와 경쟁하여[11] 1번 타자 자리를 차지, 4월 26일 히로시마전에서 25년 만에 첫 회 선두 타자 런닝 홈런, 8월 4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나카타 유키지 투구 시 단독 홈 스틸을 성공시키는 등[12] 활약했다. 5월부터 시즌 종료까지 27연속 도루 센트럴 리그 기록을 세워 33도루로 도루왕을 획득, 팀의 14년 만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고, 첫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일본 시리즈에서 타율 .367로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미일 야구 4차전에서 홈 돌입 시 오른 어깨 탈구인대가 끊어져 수술을 받았다.[14] 계약 갱신에서 연봉 약 3배 증가한 6,050만 엔(추정)으로 증가했다.[15]

1993년 조기 회복[16]으로 개막전 선발 출장했지만, 타격 부진으로 조 유히로 등과 병용되었다.[17] 타율 .216, 11도루에 그쳤다. 일본 시리즈에서 타율 .400을 기록, 4차전 8회 초 다이렉트 백홈으로 2루 주자 생환을 저지하는 좋은 플레이(후술)로 우수 선수상을 획득했다.[46]

1994년 중견수 레귤러 자리를 되찾아 타율 .290, 30도루를 기록, 연봉 8,500만 엔(추정)이 되었다.[18]

1995년 4월 8일 쿠와타 마스미 사구 영향으로 타격 부진, 시즌 타율 .253에 그쳤지만 전 경기 출장으로 연봉 9,500만 엔(추정)으로 증가했다.[19] 9월 30일 진구 구장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테리 브로스가 9회 2사 마쓰이 히데키를 외야 플라이로 잡아 리그 우승이 결정되었다. 일본 시리즈 1차전 첫 회 볼넷 출루, 나카지마 상대로 도루 성공, 2회 선제 적시타로 1차전 승리에 기여했지만, 시리즈 타율 .261로 3할을 밑돌았다.

1996년 무릎과 발목 부상으로 도루 13개로 감소했다.

1997년 부상 치료 후 시즌을 맞이했지만, 7월 1일 자이언츠전에서 1루수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충돌, 왼쪽 무릎 타박상을 입었다. 노무라의 분노를 사 2군으로 강등되었다. 마나카 미쓰루가 중견수로 들어가 4할 타율을 기록, 1군 복귀가 늦어졌지만, 8월 8일 복귀 후 타격 호조로 타율 3할을 기록,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10월 11일 히로시마전 슬라이딩 귀루 시 왼쪽 견갑골 골절, 일본 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했다. 최고 연봉 1억 2,500만 엔(추정)으로 계약 갱신,[20] 후루타에 이어 팀 2번째 고액 연봉이었다.

1998년 4월 23일 주니치전 왼손 새끼손가락 제2관절 탈구 동반 박리 골절,[21] 5년 만에 규정 타석 미달. 자유 계약 선수 권리 획득, 연봉 20% 삭감 1억 엔, 재계약금 5,000만 엔, 5년 장기 계약.[20] 이후 잦은 부상과 마나카 등 외야수 두각으로 출전 기회 감소.

2001년 우투수 상대 벤치 스타트, 경기 후반 중견수 마나카가 알렉스 라미레스로 교체, 좌익수로 들어가고 이이다가 중견 수비, 수비 능력은 높게 평가받았다.[22]

2002년 개막 직후 왼쪽 무릎 후방 십자 인대 부상, 33경기 출전, 50% 삭감된 연봉 5,000만 엔 계약.[23] 1994년부터 진구 구장에 "이이다 시트" 설치, 매 경기 20명, 연 17,000명 이상 소년 자비 초청 공적, 11월 22일 골든 스피릿상 수상.

2004년 3경기 출전, 전력 외 통보. 지도자 제안 없이 타 구단 현역 속행 희망,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 은퇴 후 코치 조건으로 무상 트레이드 이적.

7. 3. 지도자·기타 경력

1998년 4월 23일 주니치 드래곤스전에서 왼손 새끼손가락 부상을 입어[68]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했다. 그 해 자유 계약 선수 권리를 획득, 연봉은 20% 삭감되었지만 5년간 장기 다년 계약을 맺었다.[67] 이후 부상과 타격 부진으로 출전 기회가 감소했다. 2001년에는 경기 종반 좌익수로 투입되어 중견수 수비를 맡는 등 수비 능력은 높게 평가받았다.[69]

2002년에는 왼쪽 무릎 부상으로 33경기 출전에 그쳤고, 연봉이 50% 삭감되었다.[70] 한편, 1994년부터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 ‘이이다 시트’(飯田シート일본어)를 마련해 소년들을 초대하는 사회 공헌 활동으로 2002년 11월 22일에 골든 스피릿상을 수상했다. 2004년에는 팀의 전력 구상에서 제외되었고, 지도자 제의를 받았지만 현역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 무상 트레이드로 이적했다.

2007년부터 친정팀 야쿠르트의 2군 외야 수비·주루 코치를 맡았고,[72] 2008년부터는 1군 수비 주루 코치로 활동했다. 2011년 12월 9일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후보에 올랐다.[73]

2013년 10월 9일, 야쿠르트를 퇴단했고,[74] 2014년부터는 닛폰 방송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

;지도자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2군 외야 수비·주루 코치(2007년)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1군 외야 수비·주루 코치(2008년 ~ 2013년)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군 외야 수비 주루 코치(2015년 ~ 2016년)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군 타격 코치(2017년 ~ 2019년)


;해설자

7. 4. 수상·타이틀 경력

이이다 데쓰야는 도루왕(1992년), 베스트 나인(1992년), 골든 글러브상 7회(1991년 ~ 1997년), JA 전농 Go·Go상 2회(Go Spikes상: 1995년 4월, Super Arm상: 1995년 9월),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2회(1992년, 1993년), 골든 스피릿상(2002년)을 수상했다.

7. 4. 1. 타이틀

7. 4. 2. 수상

수상


7. 5. 개인 기록

이이다 데쓰야는 첫 출장, 첫 도루, 첫 안타, 첫 홈런, 첫 선발 출장 등의 첫 기록과 1000경기 출장, 1000안타, 1500경기 출장 등의 이정표 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한 올스타 게임에 2회 출전했고, 외야수 레인지 팩터 1위를 3회 기록했으며, 1회 선두 타자 런닝 홈런을 기록한 바 있다.[56][4]

7. 5. 1. 첫 기록

7. 5. 2. 기록 달성 경력

달성일기록상대팀구장비고
1998년 8월 25일통산 1000경기 출장히로시마 도요 카프메이지 진구 야구장8회말 도바시 가쓰유키의 대주자로 출장, 역대 347번째 (다니시게 모토노부와 같은 날 달성)[4]
1998년 10월 9일통산 1000안타한신 타이거스메이지 진구 야구장7회말 나카고미 신에게서 우중간 2루타, 역대 193번째[4]
2006년 9월 22일통산 1500경기 출장세이부 라이온스풀캐스트 스타디움 미야기1번·중견수로 선발 출장, 역대 148번째[4]


7. 5. 3. 기타

7. 6. 등번호

연도등번호
1987년 ~ 1990년58
1991년 ~ 2006년2
2007년 ~ 2011년85
2012년 ~ 2013년88
2015년 ~ 2019년78


참조

[1]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3-05-05
[2]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90-06-04
[3] 뉴스 読売新聞 1986-12-02
[4] 간행물 Number 1993-01-20
[5]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89-11-06
[6] 서적 甲子園への遺言
[7] 서적 私の教え子ベストナイン
[8] 뉴스 日刊ゲンダイDIGITAL https://www.nikkan-g[...] 2020-04-14
[9]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3-05-05
[10]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3-05-05
[11] 간행물 Number 1992-07-05
[12]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3-05-05
[13] 간행물 Number 1993-01-20
[14] 뉴스 読売新聞 1992-11-07
[15] 뉴스 読売新聞 1992-12-05
[16] 뉴스 毎日新聞 1993-04-01
[17] 뉴스 読売新聞 1993-09-16
[18] 뉴스 読売新聞 1994-12-27
[19] 뉴스 読売新聞 1995-12-09
[20]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98-11-02
[21] 뉴스 毎日新聞 1998-04-24
[22]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10-20
[23]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3-05-05
[24]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6-12-25
[25] 웹사이트 野村克則「ドラフト前に父・克也から『おまえじゃ無理だ』と忠告された激動の野球人生」 https://www.excite.c[...] 2021-10-06
[26] 웹사이트 2006年10月1日(日)楽天イーグルス vs 千葉ロッテ 成績詳細(出場選手成績)|東北楽天ゴールデンイーグルス https://www.rakutene[...] 2021-10-06
[27] 웹사이트 2006年10月1日(日)楽天イーグルス vs 千葉ロッテマリーンズ 試合戦評|東北楽天ゴールデンイーグルス https://sp.rakutenea[...] 2021-10-06
[28] 뉴스 朝日新聞 2006-10-20
[29] 웹사이트 「平成24年 第52回競技者表彰委員会 野球殿堂入り候補者名簿」発表 http://www.npb.or.jp[...]
[30] 웹사이트 契約満了のお知らせ(コーチ) http://www.yakult-sw[...] 2013-10-09
[31] 뉴스 ソフトB、飯田哲也氏のコーチ就任発表 https://www.nikkansp[...] 2014-11-17
[32] 웹사이트 2016/10/28 プレスリリース コーチ担当変更のお知らせ http://www.softbankh[...] 福岡ソフトバンクホークスオフィシャルサイト 2017-05-09
[33] 웹사이트 2018/11/8(木) プレスリリース コーチ担当変更のお知らせ https://www.softbank[...] 福岡ソフトバンクホークスオフィシャルサイト 2019-03-01
[34] 웹사이트 コーチングスタッフの退団について https://www.softbank[...] 2019-10-07
[35] 뉴스 元ヤクルト飯田哲也氏、母校・拓大紅陵のコーチ就任 https://www.nikkansp[...] 2020-08-29
[36] 웹사이트 竹山も号泣!「ナイトスクープ」の神回エピソード https://web.archive.[...] 日刊大衆 2018-09-26
[37] 간행물 Number、1993年1月20日号、P.29
[38] 서적 跳び箱神話part1 레조넌스 출판
[39] 서적 跳び箱神話part1 레조넌스 출판
[40] 서적 跳び箱神話part2 레조넌스 출판
[41] 웹사이트 過去20年で最高の外野手は誰だ?~記録で見る真実の「守備力」~(1ページ目) http://number.bunshu[...] 田端到 2014-07-13
[42] 웹사이트 過去20年で最高の外野手は誰だ?~記録で見る真実の「守備力」~(4ページ目) http://number.bunshu[...] 田端到 2014-07-13
[43]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1999年7月5日号、P.25
[44]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06年12月25日号、P.36
[45]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1999年7月5日号、P.24
[46]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06年12月25日号、P.37
[47]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06年12月25日号、P.38
[48] 서적 跳び箱伝説 part.1 레조넌스 출판
[49] 웹사이트 “スポーツマンNo.1”初参加で優勝、飯田哲也が本気になった理由「Jリーガーには絶対に負けたくない」「楽屋では『無理したらケガするよ』とか言ってたのに…」 https://number.bunsh[...] 2022-09-13
[50] 웹사이트 「ビーチフラッグスは野球選手が有利でした」“スポーツマンNo.1の申し子”飯田哲也が明かす名物競技のコツ「ショットガンタッチのポイントは…」 https://number.bunsh[...] 2022-09-13
[51] 웹사이트 過去20年で最高の外野手は誰だ?~記録で見る真実の「守備力」~ http://number.bunshu[...] 2016-03-17
[52]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2014年5月26日号97ページ
[53]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3년 5월 5일자, p.56
[54]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90년 6월 4일자, p.133
[55] 뉴스 요미우리 신문, 1986년 12월 2일자 조간, p.17
[56] 간행물 Sports Graphic Number, 1993년 1월 20일자, p.28
[57]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3년 5월 5일자, p.57
[58]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3년 5월 5일자, p.58
[59] 간행물 Sports Graphic Number, 1992년 7월 5일자, p.24
[60] 간행물 Sports Graphic Number, 1993년 1월 20일자, p.31
[61] 뉴스 요미우리 신문, 1992년 11월 7일자 조간, p.19
[62] 뉴스 요미우리 신문, 1992년 12월 5일자 조간, p.19
[63] 뉴스 마이니치 신문, 1993년 4월 1일자 조간, p.19
[64] 뉴스 요미우리 신문, 1993년 9월 16일자 석간, p.3
[65] 뉴스 요미우리 신문, 1994년 12월 27일자 조간, p.17
[66] 뉴스 요미우리 신문, 1995년 12월 9일자 조간, p.16
[67]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98년 11월 2일자, p.32
[68] 뉴스 마이니치 신문, 1998년 4월 24일자 조간, p.22
[69]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1년 10월 20일 임시 증간호, p.53
[70]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3년 5월 5일자, p.59
[71]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6-12-25
[72] 뉴스 아사히 신문 2006-10-20
[73] 웹사이트 平成24年 第52回競技者表彰委員会 野球殿堂入り候補者名簿」発表 http://www.npb.or.jp[...]
[74] 웹사이트 관련 내용 http://www.yakult-sw[...] 2013-10-09
[75] 간행물 Sports Graphic Number 1993-01-20
[76] 웹사이트 관련 기사 http://number.bunshu[...]
[77] 웹사이트 관련 기사 http://number.bunshu[...]
[78]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99-07-05
[79]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6-12-25
[80]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99-07-05
[81]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6-12-25
[82]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6-12-25
[83] 서적 《뜀틀 전설 Part.1》 레저넌스 출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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